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설정은 한․영통상조약과, 한․불통상조약. 그리고 1883년 11월 26일 전권대신 민영목(閔泳穆)과 독일공사가 서명하여 서울에서 체결된 한․독통상조약 등 국제조약에 근거한다. 그리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설정의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0년 7월 24일 미국공사가 외교경로를 통하여 “外國人葬地劃定要請”을 요청함으로 시작되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설정의 계기를 마련한 헤론의 죽음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존 헤론(Heron, John W.)은 외국인 최초로 서울에서 이질로 별세하였다. 이 사건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설정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공사 허드(Heard, Augustine, 何德)는 1890년 7월 24일(庚寅 6월 8일)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목에게 “외국인 장지 획정요청”을 하면서 1884년(光緖10년 3월 8일) 조인된 조․영통상조약 제4관 5절의 영문 규정을 인용하면서 남대문 밖 남산 기슭의 땅에 외국인 묘지의 설정을 외교경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It would appear that up to this time nothing has been done to carry out this provision, & I would suggest to Your Excellency the advisability of repairing this omission without delay, A death may occur at any moment. I am informed that a suitable spot may be found outside the South Gate on the slope of Nam San, and I would request Your Excellency kindly to take immediate steps to designate a plot of sufficient area. I shall be happy to cooperate with Your Excellency in choosing and marking at the boundaries of the place.

  그는 이와 병행하여 “美人惠論葬地指定要請”의 제목으로 “敬啓者, 因塋地未定, 惠論屍身尙不掩土. 幸於明天, 派送主事一員於指定處所, 以爲克完切盼, 此頌日址”라 기록한 외교문서로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양화진이 외국인 묘지로 확정되기까지는 복잡한 절차와 어려움이 있어 쉽게 확정 되지 못하였다. 서울에 외국인 묘지가 설정된 사례가 없었으며, 장안에는 묘를 조성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정부는 묘지 설정에 대하여 이미 독일, 영국, 프랑스 등과 외교 협정으로 근거는 마련하였지만 묘지를 매입하여 실행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미국공사와 정부 당국자간에 외국인묘지 설정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협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양화진 묘지설정에 근거가 되는 국제 조약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창덕궁조약’으로 1884년(광서10년 3월 8일) 체결된 한․영통상조약 제4관 5절에 “The Corean Authorities will set apart, free of cost, at each of the places open to trade, a suitable piece of ground as a foreign cemetery, upon which no rent, land tax, or other charges shall be payable, and the management of which shall be left to the Municipal Council above mentioned"이라 협정되었다. 즉 조선정부는 각 통상지역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외국인 묘지로 설정해 주고, 묘지 관리는 외국 기관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협정이었다.  

  둘째, 1886년(光緖 13년 4월 7일) ‘경복궁조약’으로 전권대신 김만식(金晩植)과 프랑스공사 간에 체결된 한․불통상조약 제4관 5절에 “朝鮮官員應在各通商處所讓出妥善之地作爲外國營葬地區其地價及一應年租課稅等項一律견免所有管理塋地章程統由以上紳董公司自行폄奪擧辨”이라 협정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공사 쁠랑시(V. C. Plancy, 葛林德)는 1890년 4월 22일 “法國人墓地劃定要請” 이라는 외교문서로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목에게 서울의 양화진과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외국인 묘지를 설정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회신이 없어 8월 2일 이를 재요청하였다.

  따라서 외국인 묘지 설정과정에서 미국 공사는 남대문 밖 남산 기슭의 땅을 요청하고, 프랑스공사는 양화진을 포함한 인천과 부산 등에 확대 할 것을 요청한 셈이다. 당시 묘지 설정의 어려웠던 사정을 H. L. 언더우드는 “헤론의 죽음으로 인해 외국인 묘지를 선정하는 문제가 생겼다. 묘지로 적당한 부지를 사용하도록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 따랐다. 조약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묘지 부지를 제공해야만 했다. 우리의 처지를 잘 알게 된 정부는 미국공사, 알렌과 2-3일 동안 협의 끝에 타협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결국 헤론의 죽음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가 설정되고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망하면 이곳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양화진이 외국인 묘지로 설정됨에 따라 정부는 후속 조치로 땅을 매입(買入)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따라서 통상교섭사무아문은 묘지용 땅을 매입하기로 하고 “蛤井里 契洞 所任 金性玉”으로 지정하여 매입할 땅의 면적 규모는 ‘春弁田 2日耕’으로 하고, 땅 값은 洋銀 40圓으로 정하여 買得하기로 했다. 토지 대금의 청산 방법은 인천항 조가 중에서 지불하도록 조치하였다. 양화진 묘지의 땅은 개인들로부터 매입하여 국가 소유로 귀속시킨 셈이다.

  그러나 소유권 보존 과정에서 이 땅을 무관심 속에서 1세기를 지나는 가운데 지가 상승에 따른 보상 문제와, 사적지로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부적법하게 소유권이 변질 되었다. 앞으로 “고종황제가 당시 한국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외국선교사의 묘지로 사용하도록 경성구미인묘지회에 하사했다”는 등의 근거가 희박한 주장과, 국제간 조약에 의하여 국가가 매입한 국유재산이 어떻게 편법적으로 사유화되었는지? 등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명백히 밝혀야 한다. 양화진 묘지는 한국기독교 성지로서 뿐 아니라 외교사적지(한국 근대화 기여자로 외교관, 법률가, 언론인. 음악가, 군인, 각전문로 활동한 역사적 인물의 묘지)로 국가 관리 체제로 환원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 조성의 첫 단계는 “朝․英協定”을 근거로 1890년 혜론(Heron, 惠論)의 단독 묘지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는 1893년 8월 하디(Hardie, 河鯉泳)․레이놀즈(Reynolds, 李訥瑞)선교사 가족과 1894년 홀(Hall, 忽)선교사와 빈턴(Vinton, 賓頓) 가족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리하여 영국, 러시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주한 5개국 공사가 외교 경로를 통하여 독판교섭통상사무 남정철(南廷哲)에게 묘지의 지단(地段)을 요청하여 지계(地界)가 설정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1896년 이후 르장드르(Legendre, 李善得),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具禮)등 역사적 인물과 야곱센(Jacobsen, 雅各善), 기포드(Gifford, 奇普)를 비롯하여 켄뮤어(Kenmure), 코르네프(Kornbev), 헐버트(Hulbert, 訖法), 밀러(Miller, 閔老雅) 가족의 묘가 설치되고, 주한 외국인 수가 늘어나 각국 외교관을 대표하여 미국공사 알렌(Allen)이 1905년 외부대신(外部大臣) 이하영(李夏榮)에게 묘지 확장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여 정부가 이를 허가함으로 확장되었다.


  양화진 묘역의 지단(地段,구역) 설정

  1893년 10월 24일 영국 총영사(務謹順)와 미국 공사(Allen)를 비롯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공사는 공동으로 외교 경로를 통하여 “外國人葬地 周圍 築墻의 件” 제목으로 외국인 묘지 구역의 경계를 정하여 주도록 독판교섭통상사무 남정철에게 공한으로 요청하였다. 이 공한에는 태서(泰西) 각국이 귀국과 맺은 조약에 “조선 관원은 각 통상 처소에서 적절한 땅을 내어 외국인 묘지 구역으로 삼는다” 라고 되어 있어 서로 상의하여 양화진을 묘지로 정하였으므로, 그 땅 주위 경계에 담장을 설치하면 보기에도 좋고 짐승과 사람들이 밟는 것을 면 할 것이니 번거롭더라도 살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부의 조치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구역이 확정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궁내부래안(宮內府來案) 제4호에는 1897년(건양2년)3월 12일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이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보낸 공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구역의 경계를 표시한 지도와 “양화진 各國人塚地 전면에 1개 3稜 地段이 있는데 그 橫線은 근100尺이오, 左右緯 下線은 근 70尺量이라하였으며 地段 안에 집이 있는데 이 땅과 집을 各國人塚地監檢官이 買得...”이라 쓰여 있다.  


양화진 묘역을 서남쪽으로 확장(擴張)

  1904년 11월 9일 미국공사 알렌(安連)은 묘지위원회 위원장(President of the Cemetery Committee) 자격으로 외부대신(外部大臣) 이하영(李夏榮)에게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확장에 관하여 외교 문서로 확장 승인을 요청하였다.

  여기에는 “외국인 묘지와 관련하여 서양 각국 대표(공사)와 본인 및 각국 국민들을 대표하여 귀하께 요청 드립니다. 조약에 의하여 서양인 묘지로 1890년 허락 받은바 있으며, 그 부지 선정 작업은 본인이 담당하였습니다. 그 장소(양화진)를 선정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으며, 부지가 매우 좁게 보였으나 부근의 한국인 묘지가 이장되면 확장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묘지는 확장되지 아니하고 외국인의 수는 증가하여 조만간 너무 협소하게 될 것입니다. 첨부된 그림 안에 한국인 묘지가 소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본인 등은 이 묘지를 침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대신 묘역 서남쪽에 위치한 국유지(Belongs to the Korean Government)를 확장 부지로 귀하께 허락을 요청합니다. 대신(장관)께서나 차관께서 양화진 묘지를 방문하신다면 기꺼이 수행하여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서울 시내(남산)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양화진을 선택하므로 귀국 정부에 큰 부담을 덜어 드렸음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렌 ”

  결국 양화진 묘지 확장 요청의 주된 사유는 주한 외국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로 1907년과 1909년을 대비해 볼 때, 미국인의 경우1907년의  297명에서 1909년에는 464명(외교관 6, 선교사 338, 직업인 96, 기타 24)으로 급격히 증가 되었다. 영국인은 87명에서 153명(외교관 11, 선교사 84, 직업인 31,기타 27)으로 증가되고, 프랑스인은 52명에서 87명(외교관 4, 선교사 50, 직업인 22, 기타 11)으로 증가되었다.

  이 같은 미국공사의 확장 요청에 대하여 외부대신 이하영은 1905년 1월 18일 “묘역 안에 있는 노옥(老屋)을 그대로 두고, 국유지로 되어 있는 서남쪽에 묘지 확장을 승낙 한다” 는 내용으로 회신하였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하여 미국공사는 외부대신에게 1905년 1월 24일 감사의 인사와, 양화진외국인 묘지에 접한 국유지(Government land)를 확장 부지로 사용 할 것이며, 부지 안의 건물은 수리하여 묘지관리인(The keeper of the cemetery, 최봉인으로 추정)이 점용(Occupy)하도록 서양 각국 대표와 협의하여 시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거듭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러시아공사 웨베르(韋貝)도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1896년 12월 21일 “楊花津外國人墓地內의老屋및地段使用件”제목의 공한을 보냈으며 이 공문을 접수한 외무아문(외무부)에서는 외아문일기에 1896년 12월 26일과 1897년 3월 13일, 16일, 21일의 처리 기록이 있다.

  위와 같은 모든 과정은 구한국 정부가 양화진 묘지의 허가권자와 토지 소유자로서 주권을 행사하고 외국 공관에 묘지 사용권만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양화진은 선교사 묘지 개념을 초월하여 한국의 중요한 “외교사적지”로서 역사적 의미와 보존가치가 있다. 일부에서 이러한 국가의 땅을 사유화 한 것이 "불평등 조약의 회복" 이라는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은 사유화를 정당화하려는 역사를 부정하는 그릇된 관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