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기(初期) 60년(1890-1950)의 묘지 관리  

  양화진외국인묘지는 1890년 설치되고, 국제간의 조약에 따라 외국기관(The Municipal Council, 租界公司 / 紳董公司)이 관리(Management) 하게 되었다. 외국기관이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주한 5개국 공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협의회를 의미한다. 이들은 묘지위원회(The Cemetery Committee)를 조직하여 체제를 구축하고 연차적으로 돌아가며 관리했다. 1904년의 경우 미국공사 알렌(安連)은 묘지위원장으로, 여타 공사들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 10월 31일자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였다.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는 매우 슬프게 보인다. 이곳은 서울 가까이에 있는 유일한 외국인을 위한 묘지이다. 이곳은 개인 자산이 아니라 모든 외국인들을 위하여 제공된 자산이다. 묘지를 둘러싼 벽이 무너져버려 인근 마을의 개들과  닭들이 싸우거나 장난치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여 잔디밭을 밀어내고 있다. 이제 외국인 공동체(Community)는 묘지를 잘 보존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묘지를 관리할 위원회(Committee)가 조직되었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다. 우리는 묘지위원회가 빠른 시일 안에 양화진 외국인묘지를 훌륭한 곳이 되도록 잘 관리하기를 바란다."

  양화진 땅의 소유자는 국가이며, 관리자가 외국기관이라는 내용은 궁내부대신(내무장관, 李載純)과 외부대신(외무장관, 李完用) 간의 문서가 궁내부래안(宮內府來案, 建陽 2年 3月 12日)에 보존되고,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한 외국인들은 묘지를 운영관리하면서 매년 6월을 현충일로 정하여 양화진에서 추모 행사를 거행했다. 1929년 6월 1일 캐나다 출신  O. R. 에비슨(Avison)은 “양화진에는 5개국 외에도 캐나다, 이태리, 아일랜드 등을 대표하는 외국인이 있다. 사회적 신분으로는 선교사, 사업가, 정치가, 군인, 언론인, 교육자, 외교관, 음악가 등이 있다. 교파로는 성공회, 가톨릭, 정교회, 감리회, 장로회, 침례회, 구세군, 성결교 등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양화진 묘지에는 5개국 외에도 더 많은 나라 사람들이 묻혀있다. 둘째 양화진에 묻힌 외국인의 사회적 신분은 선교사 뿐 아니라 외교관, 군인, 교육자, 정치가, 사업가, 언론인, 음악가 등으로 다양하다. 셋째, 선교사 중 종교적 교파로는 성공회, 가톨릭, 정교회, 구세군, 감리회, 장로회, 침례회, 성결교 등으로 다양하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양화진은 선교사묘지가 아니라 외국인묘지였다. 건설부와 서울시는 외국인묘지공원으로 고시했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위해 조성된 묘지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초교파 교회의 정체성도 불확실한 “100주년기념교회" 가 관리주체가 되는 것은 역사적 순리에 더욱 맞지 않는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초교파(성공회, 가톨릭, 정교회, 구세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교회라면 신조(信條)와 헌법이 의심스럽다. 소유권을 증여의 형식을 빌어 합법화한 것은 양심과 도의에 어긋난 처사이며 더구나, 사용권과 관리보존권의 이양은 근거가 희박하다.


2.중기(中期) 30년(1950-1980)의 묘지 관리

  이 기간은 관리가 소홀하고, 양화진 묘지가 존폐(存廢) 위기에 처했던 기간이었다. 6․25전쟁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묘지를 돌보는데 참으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지하철 2호선 계획으로 인하여 묘지자체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고 했다. 전택부는 묘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분개하여 부당성을 고발하고, 기독공보에 양화진 외인열전을 연재했다. 양화대교 진입도로 부지에 묘지가 편입되어 뜻있는 한국 교계 지도자와 외국인 대표들이 적극 노력하고, 서울시가 이를 조정하여 그 규모를 축소(6필지, 1,846m2)하는 선에서 외국인묘지는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묘지 관리는 언더우드(원일한) 등 연고자 중심의 묘지위원회 체제에서 1956년 외국인 공동체(서울외국인교회(Seoul Union Church)가 회원)로 이관되었다. 이들은 묘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법적 조처를 강구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건설부 고시 제1564(1965.5.6)호로 외국인묘지공원으로 지정받고, 서울시 고시 제503(1978.9.23)호로 외국인묘지공원으로 확정 받았다. 양화대교 진입도로에 편입된 묘지도 진정(1979. 7. 7)을 통하여 밀집 부분이 제외되었다.

  그러나 지하철과 도로공사에 수반한  토지 보상금 약 3억원 때문에 관리권과 소유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땅은 국가 소유이므로 땅 값은 국고에 당연히 귀속되고, 묘(墓)의 이장비(移葬費)는 관리자(묘지위원회)가 수령해야 했다. 그런데 마포구의 그릇된 판단과, 묘지위원회의 장기간 점유(사용, 관리)권을 소유권으로 오인(誤認)하여, 총독부 시절에 작성된 토지대장(1913.7.1)과 연계하여 보상비 수령을 위하여 만방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권 미등기로 인하여 보상비 3억 원은 수령하지 못했다. 그 후 소유권 등기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소유권등기의 합법화에 따른 적법(適法)한 근거가 없어 실패했다. 역사의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외국인묘지의 명칭은 惠論埋葬處所(1890), 外國人葬地(1893), 楊花津各國人塚地(1896), 楊花津外人墓地(1904) 등으로 다양하게 호칭되었다.

  1929년 서울외국인묘지로 불리기도 했는데, 1965년 건설부 고시로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지정되어 1978년 서울시 고시 제503호로 외국인묘지공원으로 공식화 되었다. 묘지의 관리는 국제간의 조약 등에 의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을 비롯하여 캐나다, 스웨덴, 이태리, 덴마크 등 주한 외국공관의 공동체(Municipal Council / Cemetery Committee) 소관이었다.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묘지라는 특성 때문에 소유권과 관리권을 명확히 구분하지 아니하고, 국제적 정치상황 변화로 관심이 저조하였으며, 그 후 특정국가 소수 연고자 중심 체제에서 관리권과 소유권을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날 묘지라는 용도 외에 재산적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때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약 3억원의 이권(토지보상금) 수령 문제가 발생했고 그리고 훗날 선교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소유권 등기가 절대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되면서 소유권의 등기에 대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소유권을 등기하기 위하여 취한 행위  

  외국인묘지공원의 토지 소유자는 역사적, 법률적, 외교적, 행정적으로 당초부터 국가였다. 총독부 시절(1913) 과세를 위하여 토지대장에 「경성구미인묘지회」라는 기록이 있으나, 묘지회가 이 땅을 국가로부터 매입했거나 양여 받은 근거는 희박하다. 고종 임금이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근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묘지회는 지상(관리)권을 소유권으로 생각하고 토지보상금(약 3억원)을 수령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서울지방법원(등기소), 서울시장, 내무부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요로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소유권은 인정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외국인토지법(법률 제2019호)에 의하여 1968년 7월 3일 그 법적 효력이 소멸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묘지회가 소유권을 등기하고자 취한 행동과 당국의 조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묘지회(원일한)는 1979년 11월 1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등 9필지 4,040평(13,355㎡에 대하여 관할 지방법원(용산등기소)에 소유권 보존 등기를 신청했다. 관할 등기소는 외국인토지법(제5조 1항)에 의한 허가서가 없으므로 등기할 수 없음을 통지했다.

  둘째, 원일한은 1979년 12월 12일 토지의 권리 취득을 위한 허가신청서를 서울시장에 제출했다. 시 당국에서는 서류 미비 사유로 신청서를 반송했다.

  셋째, 원일한은 1980년 3월 25일 묘지회 정관, 총회 의사록 등을 보완하여 다시 신청 했다. 서울시는 “취득 목적이 부적정하여 허가가 불가한 사항”이라고 회시 했다.

  넷째, 원일한은 서울시 조치에 불복하고 1980년 5월 20일 내무부장관에게 소유권 보존등기를 청원했다. 내무부는 『1913년 토지사정당시 경성구미인묘지회가 취득한 권리는 1968년 7월 3일 법률 제2019호(부칙 제2항 및 3항) 규정에 의하여 그 법적 효력이 소멸되었다.』라고 했다.

  다섯째, 원일한은 내무부장관의 조치에도 불복하여 대통령에게 소유권 보존을 위한 진정서(1980.11.20)와 건의서(1981. 4. 26)를 제출했다. 대통령 비서실은 이를 내무부장관에게 이첩했다.

  여섯째, 건의서를 이첩 받은 내무부는 이를 재검토하고 1981년 5월 25일 『소유권 취득은 불가하나, 묘지관리를 위한 토지사용과 관리권은 묘지회를 비롯한 연고자에게 인정할 방침』이라고 소유권과 관리권을 명백히 구분하여 회시했다. 결국 묘지회는 소유권의 등기에는 실패했다.            


소유권의 조건부 명의신탁 증여

  기독교 선교 100년이 되던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회원은 서울외국인교회(Seoul Union Church)) 대표 원일한은 100주년 선교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소유권 등기가 "외국인토지법"의 저촉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건립이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다음의 보고 사항처럼 전전긍긍하던 중 한국인의 명의로는 소유권 등기가 가능하며 그렇게 등기된 토지 위에 "선교기념관"의 건립은 가능하다는 협의안을 받아들인다.

    보고;
    위원장이 그동안 본 경성구미인묘지회에서 합정동 소재 본회소유묘지의 소유권취득과
    기념관의 건축을 위하여 각 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외국인 토지법의 저촉으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이 모든 계획과 사업을 한국기독교 100주년사업협의회에 맡겨
    진행하여 온 경과를 보고하다.


  그리고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명의로 소유권을 등기하기로 하면서 그 대신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아서 소유권의 증여를 하게 된다.

    조건1. 별지 목록 부동산 전부를 외국인묘지 공원으로 지정받아 외국인묘지로 영구히 관리보존한다.
    조건2. 묘지공원내에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이 묘역에 잠든이들의 공적을 이 땅에 기리게 한다.
    조건3. 공원묘역의 장래 사업계획에 대하여 다음의 위원을 파송하여 수증자와 협의하도록 한다.


  위의 조건에 따라서 경성구미인묘지회는 1985년 3월 4일 국유지 15필지 4,322평(14,287㎡)의 소유권을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협의회에 한장의 증여증서를 넘기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숙원사업이었던 선교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게 되며 선교기념관 및 토지의 법적소유권은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두게 하고 그 대신 선교기념관 및 토지의 사용권과 관리보존권은 경성구미인묘지회(서울외국인교회(Seoul Union Church))가 소지하는 것으로 되었다. 선교기념관의 건립은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과 한국근대문화의 발전에서 희생과 봉사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고귀한 선교사들의 선교정신을 기리고 그 고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양화진외국인묘지공원은 선교사나 애국의 선각자들을 기념하기위한 만큼 그 자손 들이 당연히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법적소유권의 등기가 당시에는 "외국인토지법"에 의하여 불가불 불가능했지만, 법이 풀리는 날에는 당연히 외국인들에게 다시 귀속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소유권의 이전은 명의만 빌리는 명의 신탁의 개념이었으며 여기에는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

    첫째, 실질적인 증여를 위하여서는 경성구미인묘지회의 정관(제9조)에 규정된 출석회원 과반수 결의의 필수 요건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총회의 결의도 없이 급히 진행한 것은 형식적 이전인 명의 이전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으며

    둘째, 실질적인 증여라며 재판없이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바로 소유권보존등기를 하면 되는데, 일단 재판의 형식을 빌어서 소유권 보존 등기는 우선 경성구미인묘지회에 있게하고 소유권 이전 등기는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있게 절차를 밟게 한 것도 미래를 대비한 그러한 수순이었으며,

    셋째, 재판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로의 약속에 의한 불참석으로 다툼이 없는 일방적 재판을 통하여 더 이상 변론도 없이 1985년 5월 8일 불과 1주일 만에 원고 승소 판결을 하도록 유도했고

    네째,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이사장도 경성구미인묘지회가 실질소유자로 등기해 주도록 정부에 건의한 공문은 실질소유자의 주인은 경성구미인묘지회에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당시에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교기념관이 건립되면서, 헌금을 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당시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이사장인 한경직목사는 외국인 선교사와 애국 선각자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고마움을 표시했고 선교기념관은 그 대가의 배려였고 긍지였었다. 또한, 선교사와 선각자들의 유족들도 그에 따른 고마움을 연설했고 그 들 사이의 우정은 깊어만 갔었다. 그래서 경성구미인묘지회(서울외국인교회(Seoul Union Church))는 1986년 이래 이 선교기념관을 사용하면서 외국인묘지공원을 그대로 지속적으로 관리보존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이사장이 서거하고 2004년에는 경성구미인묘지회의 대표 원일한마져 서거하자 양화진의 외국인묘지는 2005년부터 문제가 일기 시작했다.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당사자들의 고귀한 선교정신과 신사협정에 의한 묘지의 선한 관리를 무시하고 그 토지의 법적등기소유권자라는 명목을 빌어서 모든 권한 행사를 주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의 유족들과 불상사가 발생하고 있으며 다툼이 일고 있다. 그릇된 권리를 국가(지자체)가 외면하고 옹호만 한다면 역사의 진실과 정의(正義)는 가려진다. 관리권을 외국 공동체(Municipal Council / Cemetery Committee)에 부여한 국제간의 조약과 신의도 존중되고 지켜지기 요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