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청나라의 권유를 받아 1882년 5월 22일, 구미(歐美)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과 국교를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때 한국 측은 신헌(申憲)·김홍집이, 미국 측은 벨트(Robert W. Shufeldt)가 참석하여 제물포 해안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엘린우드(Ellinwood)가 브룩클린교회 맥월리엄스(McWilliams)를 움직여 5천 달러의 선교기금으로 헌납하도록 했는데 이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도 호응하여 기부금이 증가되었다. 선교본부는 1884년 존 헤론(John W. Heron)을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뒤이어 언더우드를 1884년 7월 28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먼저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중국에서 입국한 알렌이다. 언더우드는 헤론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먼저 내한하였다.

개신교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개시한 역사적 근거는 여러 경로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칼 귀츨라프(Gutzlaff) 목사의 입국

      개신교 선교사로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한 외국 선교사는 1832년 7월, 의사이며 목사였던 독일 출신의 칼 F. A. 귀츨라프(Gutzlaff, Karl F. August) 목사라 할 수 있다. 그는 충청남도 고대도(古代島)에서 성서(2권)와 교리서를 전달하고, 홍주목사(洪州牧使)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또한 감자 씨를 섬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귀츨라프는 영의 양식 "주기도문"과 육의 양식 "감자"의 보급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도움을 준 선교사이다. 그는 "내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 섭리 속에서 열매 맺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이를 믿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파하였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귀츨라프는 복음의 씨앗을 한국에 뿌린 고마운 선교사이다. 1851년 홍콩에서 별세하였다.

    ◇ 로버트 J. 토마스(Thomas, 崔蘭軒) 목사의 입국

      1865년 영국 출신(1840.9.7생)의 로버트 J. 토마스(Robert J. Thomas) 목사의 입국에 의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다. 그는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황해도 앞 바다에 1차 머물면서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br>그후 1866년 7월 29일 중국에서 윌리암슨이 제공한 한문 성경을 가지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평양시민들에게 1866년 9월 5일 26세에 순교하였다. 이때 뿌린 성서가 뒷날 여러 형태로 복음의 열매를 맺게되었다. 토마스 목사를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 호레이스 N. 알렌(Allen)의 입국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1883년 10월에 중국에 부임했던 알렌(Allen, Horace Newton)이 1884년 9월 22일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민영익의 치료로 알렌의 의술은 왕실과 한국 정부에 뚜렷하게 각인 시켰으며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다. 주한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 대리공사, 공사를 역임하면서 선교사들이 쉽게 입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5년 6월 10일 귀국하였다.
    br>그는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딜러웨어)에서 출생하여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도레도)에서 별세하였다. 알렌의 일기에 기록된 1885년 6월 28일의 광혜원에서 첫 예배 활동을 한국 개신교 활동 시발점의 기준으로 삼는 사례가 있다.(주: 병원교회로 출발 한 오늘의 남대문교회의 경우 제중원에서의 첫 예배일인 1887년 11월 21일을 교회 창립기념일로 지키고 있으나 아직 교회사가들의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님)

  1. 미국 북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을 출발하여 일본에서 한국에 오는 배편(船便)을 기다리며 체류하다가 이수정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웠으며,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입수할 수 있었다. 1885년 3월 31일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4월 2일 부산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 배에는 아펜젤러 부부가 미국 북감리회의 파송을 받아 승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한국 땅을 딛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은 같은 날 도착한 셈이다.
    언더우드는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면서 양화진을 경유하여 도성(정동)에 정착하였다. 그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경기 서부지역과 황해도·평안도 지방의 선교여행을 할 때에도 양화진은 경유지가 되곤 하였다.
    이밖에 다른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와 전도 여행에도 양화진은 인천과 서해안 각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곤 하였다. 같은 해 6월 21일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이 도착하였다. 뒤이어 엘러스(Annie Ellers)·홀튼(Lillias S. Horton) 두 미혼 여의사도 도착하였다. M. H. 기포드(Gifford) 여성 선교사(서교동교회 설립자)는 1888년 9월 28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2.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Australia)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 출신인 데이비스 남매(J. H. Mary Davis)는 1888년에 조직된 빅토리아 장로회 신도협회의 재정 지원에 의하여 1889년 10월,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1890년 선교 지를 물색하기 위해 부산으로 선교 여행을 하다가 천연두와 폐렴으로 1890년 4월 15일 부산에서 동생이 별세하자 귀국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인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되어 1891년 10월, 맥케이(J. H. Mackay)·멘지스(Manzie)·포오셋(M. Fawcett)·페리(Jean Perry) 등을 선교사로 파송 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3. 미국 남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간 언더우드는 1891년 테네시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생 동맹에 참석하여 한국 선교에 관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많은 신학생들을 감명 깊게 하였다. 이 때 신학교 졸업반의 테이트(L. B. Tate)·존슨(C. Johson), 레이놀즈(W. D. Reynolds)와 전킨(W. M. Junkin)은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존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5천 달러를 헌금하였다. 결국 선교 지망자들의 열성적인 노력과, 선교 헌금이 답지하여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는 테이트·전킨·레이놀즈와 데이비스(Linie Davis)·볼링(P. Bolling)·레이번(M. Leybun)과 테이트의 여동생(Mattie Tate)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그들은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4. 캐나다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초기에 캐나다 선교사들은 토론토대학의 YMCA 등의 지원으로, 어떤 교단적인 배경을 갖지 않고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평신도였으며, 게일(J. S. Gale)은 1888년 12월 16일 내한하여 선교 활동을 개시했다. 펜윅(Malcolm Fenwick)은 토론토 실업 인들의 지원으로 1889년 말에 내한하였다. 하디(R. A. Hardie), 홀(W. J. Hall)은 1890년 9월에, 에비슨(O. R. Avison)은 1893년 7월에 입국하였다. 1893년 12월 18일에 맥켄지(W. J. Mckenzie)가 황해도 소래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