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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귀츨라프의 7월 25일 고대도와 원산도 정박론 비교
이름
  신호철  작성일 : 2016-10-30 18:56:32  조회 : 545 

                 귀츨라프의 7월 25일 고대도와 원산도 정박론 비교

가. 7월 25일 고대도 정박의 세가지 주장론  
본서(귀츨라프 행전, 2009)는 귀츨라프 일행의 고대도 정박에 대하여 “1832년 7월 23일 충청해안의 세 번째 정박지 불모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4일 네 번째 정박지 고대도 목안으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 라고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편 “귀츨라프의 생애와 조선선고 활동(허호익, 2009)”은 1832년 7월 24일 녹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5일 고대도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최근 “굿모닝 귀츨라프(오현기, 2014)”는 1832년 7월 24일 불모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5일 고대도 안항에 정박하였다는 각기 다른 정박론 주장이 있다.

1) 7월 25일 고대도 정박의 대표적 주장론
“귀츨라프의 생애와 조선선고 활동”은 ‘원산도의 역사적 고증 문제’에서 귀츨라프 일행은 < 7월 24일 녹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5일 고대도에 정박하였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모순되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
1) 귀츨라프 일행은 조선 관리들의 요청으로 7월 25일 Gan keang이라는 안전한 항구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8월 11일까지 정박하였다.(p.116)
2) 고대도라는 지명이 일성록에 모두 12회 등장하지만 Gan keang이나 유사한 지명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p.118)
3) 정박하기가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된 곳으로 알려진 Gan keang 즉 고대도 안항이 고대도의 안전한 항구가 아닌가 여겨진다. 고대도는 1600년대 초반부터 조곡미를 운반하던 조운선 중간 기착지였고, 중국 배가 출입하는 등 교역의 요충지였다.(p.120).
4) 7월 24일에 정박한 곳은 고대도가 아니고 녹도이다. 24일 녹도를 방문한 Teng no가 그곳에서 10마일 거리에 있는 항구로 이동할 것을 권하고, 7월 25일에  도선사를 데리고 다시 와서 녹도에서 7마일 거리에 늘어선 섬들을 통과하여  안전한 항구 Gan keang으로 이동했다.(p.122)
  5) 귀츨라프 일행이 1832년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정박하여 Gan keang으로 알고 있었던 곳은 당시의 행정 구역상 고대도 안항이 분명하다.(p.125)  

또한 본서(귀츨라프 행전)가 새롭게 발표한 “1832년 7월 24일 귀츨라프 일행의 정박지는 고대도 목안이며, 7월 25일 정박지는 Gan keang 즉 원산도의 점촌과 개갱 사이에 위치한 개갱 앞바다”라는 고증결과의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첫째, 귀츨라프 일행은 Gan keang을 만(bay)으로 지칭했다, 개경촌 지명이 발음상 유사하다하여 원산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1832년경에는 원산도가 고대도보다 인구가 적었고, 167년 이전에 개경촌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농업을 주로 하는 원산도에 선착장이 개설된 시기는 최근이기 때문이다.(p.121)
  둘째, 7월 24일 고대도에 정박하였다가 25일  Gan keang 즉 개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도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귀츨라프 일행이 7월 24일에 정박한 곳은 고대도가 아니고 녹도이다. 24일 녹도를 방문한 Teng no가 그곳에서 10마일 거리에 있는 항구로 이동할 것을 권하고 7월 25일에 도선사를 데리고 다시 와서 녹도에서 7마일 거리에 늘어선 섬들을 통과하여  안전한 항구 Gan keang으로 이동하였다.(p.122)
셋째, 조선 관리들이 귀츨라프 일행의 행적을 조사하여, 67명 선원 이름 등에 까지 조사하여 승정원에 보고하면서 정박한 지역이 원산도인데 고대도로 잘못 보고했을 리 없다(p.123)
넷째, 지방 관리의 보고 사항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파송된 문정역관 오계순은 공충수사 이재형 등을 파직 권고한바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볼 수  없다.(p.123)
다섯째, 7월 22일 수군우후 김형수가 녹도별장으로부터 이양선의 출몰을 보고 받고, 7월 25일 등노(Teng no) 등을 파견하여 안전한 항구로 이동시키고, 26일 그들을 직접 만나 문정하였다. 수군우후는 평상시 원산도에 머물러 있었다. 정황적으로 수군우후 김형수가 대포로 무장한 외국선박을 원산도로 이끌어 왔을 가능성은 군사적 측면에서 낮아 보인다.( p.124)  
여섯째, 귀츨라프는 7월 30일 감자를 심어준 후 언덕 위에 당집을 찾아갔다. 고대도 에는 지금도 신당이 남아 있다.(p.124)
일곱째,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8일 물을 길러 반대편 섬으로 갔을 때  조선인 수백 명이 금방 모여들어 즐겁게 도와주었다. 이 섬은 원산도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귀츨라프 일행이 1832년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정박하여 Gan keang으로 알고 있었던 곳은 당시의 행정 구역상 고대도 안항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Gan keang이 원산도의 개경촌이라는 주장의 역사적 객관적 근거는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p.125)  라고 하면서 일곱 항목을 열거하며 본서의 7월 24일 고대도 정박론을 부정하였다.  

2) 7월 25일 고대도 정박의 최근 주장론
  “굿모닝 귀츨라프(오현기, 2014)의 고대도 안항 정박론은 <7월 24일 불모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5일 고대도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라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주장하였다.  
 1)귀츨라프 일행이 승선한 애머스트호가 7월 21일 머문 곳은 Hutton(외연도)으로 추측했다. 7월 23일까지는 녹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녹도 다음 정박지는 불모도였다.(p.188)
2)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5일 불모도를 출발해 당일에 고대도에 도착했다. 고대도 도착 날짜가 7월 23일(음 6월 26일) 유시라는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7월 25일이 더 타당하다. 그들은 제일 먼저 외연도 근처에 도착(7월 21일)했고 녹도정박(7월21-23일)을 거쳐 불모도(7월 23-25일)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권유에 따라 고대도(7월 25일)로 옮겨 갔다.(p.190).
3) 조선인들이 안전한 곳이라고 말했던 장소이자 귀츨라프가 Gan Keang 이라고 지칭한 곳은 고대도 안항이다. 왜냐하면 일성록 등에 고대도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p.194).
4) 8월 12일 고대도 안항에서 퇴거하여 8월 17일 제주도 근처에 도착하기 전까지 고대도는 귀츨라프가 조선 방문 일정의 절반 이상을 들여 선교활동을 진행한 곳이다.(p.211)
라고 주장하면서  본서의 7월 25일 원산도 정박론을 부정하였다.
  
3) 7월 25일 고대도 정박의 기존 주장론
“귀츨라프와 고대도(리진호,1988)”의 <두 곽목사의 고대도 선교>에서는 <7월 25일은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와서 정박한 날이다.> 라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간단하게 주장을 하였다.
1) 7월 25일은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와서 정박한 날이다.(p.79)
2) 귀츨라프가 원산도에 상륙하였다는 것은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래의 한국천주교회사(1874)에 기록되어 있고 이를 백락준 박사가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 소개하였다.(p.81)
3)순조실록에 홍주목사가 국왕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고대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 한하여 달레의 기록은 신빙성이 적다.(p.82).
라는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을 주장하였다.


  나.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의 잘못을 입증하는 관련 기록들    
  귀츨라프 일행의 충청해안 정박 일정에 대하여 본서(귀츨라프 행전)는 1832년 7월 21일 외연도에 정박하였다. 이들은 해양탐사를 계속하며 동쪽으로 이동하여 7월 22일에는 녹도에 정박하였다. 7월 23일에는 불모도에 정박하였다. 7월 24일에는 고대도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에는 원산도의 점촌과 개갱 사이의 만(북위 36도 22분, 동경 126도 25분) 즉 개갱촌 앞바다에 정박하였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7월 24일 고대도 정박론은 7월 25일 정박론과 대립되고 있다.
이에 따라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의 잘못을 입증하는 반증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의 1832년 8월 16일(음 7월 21일)자 기록에 의하면, 7월 22일(음 6월 25일) 배(三汎竹船) 1척이 홍주의 고대도 후양(後洋)에 와서 정박하였다. 이 기록은 고대도 정박 사실은 입증되지만 정박날짜는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2) 순조실록 咨文의 1832년 8월 16일(음 7월 21일)자 기록에 의하면, 7월 23일(음 6월 26일) 이양선 1척이 고대도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다. 이 기록도 고대도 정박 사실은 입증되지만  정박 날짜는 불일치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7월 25일 고대도에 정박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은 설득력이 없다.    
3) 일성록의 9월 1일(음 8월 7일)자 기록에 의하면, 7월 22일 녹도별장(別將)은 원산도에 주재하고 있는 수군우후(김형수)에게 “이양선이 7월 22일(음 6월 25일) 녹도를 지나 불모도 쪽으로 항해하고 있다고 급보하였다” *116) 이 기록은 7월 22일 녹도 정박의 입증 근거가 된다. 따라서 7월 24일의 녹도 정박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4) 일성록의 9월 1일(음 8월 7일)자 기록에 의하면, 홍주목사(이민회)가 증언하기를 “저는 수군우후의 공문을 받아보니 이양선이 7월 23일(음 6월 26일) 불모도에 정박 중이라 하였다.”*101) 그리고 8월 1일(음 7월 6일)자 備邊司謄錄에도 이양선이 불모도 뒷 바다에 표도하였다. p.95) 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7월 23일 불모도 정박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7월 24일 녹도에서 고대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5) 귀츨라프의 7월 24일(음 6월 27일)자 일기에 의하면, 큰 배가 가까이 와서 그들은 선실로 들어와 자신을 관리(Teng no)라고 소개한 후 우리가 대단히 위험한 곳에 정박하고 있으니, Gan keang이라는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며, 그곳에는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고, 고관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120)    이 같은 기록은 조선 정부의 ⓐ 비변사등록(음 7월 8일)에 고대도에 인박한 외국인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더니 영국인이라 하였으며 통상교역을 요청하였다.p.109)’  ⓑ 일성록(음 7월 8일)에 고대도에 인박한 외국인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다.p.110)  ⓒ 승정원일기(음7월 9일)에도 고대도에 인박한 사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문정하였다. 등 관련기록과 종합하여 비교하여 보면 귀츨라프 일행의 불모도 다음 행선지는 고대도이다. 그리고 녹도별장의 보고에 따라 원산도에 주재한 수군우후가 파견한 Teng no는 귀츨라프 일행과 7월 24일 필담이 처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7월 24일 정박 장소는 녹도나 불모도가 아니다. 그리고 배가 정박하기에 대단히 위험한 장소로서 고대도의 지리적 해양적 입지 환경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본서의 7월 24일 고대도의 정박주장은 당위성이 있다.
6) 귀츨라프의 7월 25일(음 6월 28일)자 일기에 의하면, Gan keang에 도착하였는데 정박하기에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되는 곳이었다. 항로를 아는 이는 오직 한 사람 뿐 이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일성록(음 8월 7일)은 수군우후 김형수가 7월 25일(음 6월 28일) 노를 저어 이양선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이양선은 내양 쪽으로 향하여 닻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필담으로 문답하였는데 교역에 관한 사항이었다. 라는 기록과 종합하여 비교하면 ⓐ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고 고관을 만날 수 있는 Gan keang은 수군우후가 주둔한  원산도이며  ⓑ 7월 25일 항해 경로와 바람막이가 잘되는 곳으로 개갱과 점촌 사이의 만은 해양적 입지조건과 일치하고, ⓒ Gan keang과 개갱은 지명의 발음도 유사하지만 옛 부터 육지와 연결하는 천마지라는 항구로 이용되었다는 보령시(보령의 지명) 기록으로 살펴 볼 때  귀츨라프 일행의 7월 25일 원산도 정박 주장은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7월 25일 고대도 정박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7) 린제이의  7월 24일(음 6월 27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한 배에 한자(漢文)를 잘 아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당신들은 위험한 곳에 노출되어 있으니 내가 안전한 항구로 안내하겠고 그곳에서는 교역청원서를 고관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름은 Teng no이며 상관의 지시로 우리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조사하러 왔다고 밝혔다. 그는 10마일 거리에 있는 만으로 우리가 즉시 배를 이동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도선사가 항로를 잘 알고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내일 이동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기록은 귀츨라프 일기와 일치하고, 원산도에 주재하고 있는 수군우후의 지시로 문정관(Teng no)이 7월 24일 위험한 곳에 파견되어 귀츨라프 일행과 필담사실이 입증 된다. 수군우후가 원산도에 주둔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1792년 1월 18일(음 1791년 12월 25일)자 기록된 근거가 있다.  따라서 7월 24일 녹도 정박주장과 7월 25일 정박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8) 린제이의 7월 25일(음 6월 28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Teng no가 다시 와서 배를 이동하자고 하였다. 우리는 뱃머리를 북동방향으로 늘어선 섬들을 향하여 키를 잡았다. 우리는 고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마을 가까운 곳에 정박하였다. 두 명의 고관이 우리를 방문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Yang yih이며 고관의 서기로 Teng no와 함께 협력관 역할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았다고 하였다. 이 같은 기록은 Teng no와 고관의 근무지가 원산도이며, 7월 25일 도선사의 안내로 항해한  경로가 북동방향으로, 항로를 아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며, 약 10마일 거리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해양적 입지조건 측면에서 살펴볼 때 고대도(목안)에서 원산도(개갱 앞바다)까지 항로와 일치하고, 고관(수군우후)의 주재 장소가 원산도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7월 25일 정박지로 원산도는 충분한 입증 근거가 된다.

이상과 같은 고대도 정박에 관한 관련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결론적으로 ⓐ 귀츨라프 일행은 1832년 7월 21일 외연도를 떠나 7월 22일 녹도에 정박하였다. 그들의 항해 목적에는 해양탐사가 포함되어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해양탐사를 계속하며 이동하였다. Rees 선장이 탐사한 “Shoal Gulf(천수만)”은 이 때 해양탐사 결과 붙여진 이름이다. ⓑ 7월 23일에는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여 불모도에 정박하였다. ⓒ 7월 24일에도 그들은 해양탐사를 계속하다가 정박한 장소는 고대도의 모란여와 선바위 사이에 있는 목안으로 연구되었다. 이곳에서 수군우후가 파견한 Teng no와 귀츨라프 일행의 첫 면담 장소가 되었다. ⓓ 다음날인 7월 25일에는 고대도(목안)에서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오직 한사만 아는 복잡한 10마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고 수군우후가 주재하고 있는 원산도(개갱과 점촌사이의 만)에 정박하였다. 그 후 이들은 이곳에  계속 머물며 8월 12일까지 활동하였다.   .    
  

다.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의 반박과 원산도 정박 주장의 당위성
  본서(귀츨라프 행전)의 “7월 24일 고대도 정박과 7월 25일 원산도 정박론 주장”에 대하여 허호익은  “Gan keang 원산도 개경촌설에 대한 반박”에서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4일 녹도에 정박하였다가 7월 25일 Gan keang이라는 안전한 항구 즉 고대도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고 였다고  다르게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모순되고 잘못된 주장이다.
귀츨라프 일행의 7월 21일 이후 항해 경로와 조선정부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7월 24일의 녹도 정박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7월 21일 외연도(Hutton)를 출발하여 7월 22일에는 이미 녹도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7월 23일 해양탐사를 계속하면서 불모도로 이동하였다. 이 같은 근거는 일성록에   기록된 녹도별장의 “7월 22일 녹도를 지나 불모도 쪽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를 뒷받침 한다. 1832년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정박하여 Gan keang으로 알고 있었던 곳은 당시의 행정 구역상 고대도 안항이 분명하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7월 25일 고대도 정박론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7월 22일 고대도 후양에 와서 정박하였다”라는 기록과, 순조실록 자문에 “7월 23일 고대도 안항에 정박하였다”라는 기록 등을 포함하여 7월 25일 고대도 정박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1832년경에는 원산도가 고대도보다 인구가 적었고 개경촌이 원산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원산도에 선착장이 개설된 시기는 최근이라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원산도와 고대도의 면적, 인구, 입지현황 등 공인된 고금의 통계자료로 볼 때 고대도와 원산도는 1:10 비율 정도이다. 고대도가 원산도보다 많은 인구를 포용할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원산도는 1425년 7월 25일자 세종실록 등에 의하면, 국립 말 목장으로 조성되어 245년간(1425-1669)간 국마(國馬)를 사육한 장소였다. 이 과정에서 종마(種馬)는 제주도에서 원산도 선착장을 통하여 들여오고, 사육된 병마(兵馬)와 역마(驛馬)는 다시 원산도 선착장을 통하여 한양에 조달되었다. 1669년 2월 3일자 현종실록에 의하면, 원산진(선착장)이 설치되고 원산도에 수군우후를 주둔하게 하였다. 또한 1792년 1월 18일(음 1791년 12월 25일) 정조실록에도 수군우후가 원산도에 주둔하였다는 근거가 있다. 이에 따라 원산도는 110년간 조운선을 점검하는 기지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고대도가 조운선 점검기지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더구나 중국배가 출입하는 등 교역의 요충지였다는 주장은 더욱 근거가 희박하다.
원산도에 선착장이 개설된 시기가 최근이라는 주장도 원산도 항만개설 역사를 모르고 하는 거짓된 주장이다. 보령시(보령의 지명) 공식기록에 따르면 개갱촌은 ‘개건너’라고도 하며, 인접된 점촌은 ‘천마지’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육지와 연결된 항구로 ‘가장먼저 육지와 맞닥뜨리는 곳’이라 전해진다. 차경철도 “오천의 어제와 오늘”에서 “옛날 육지와 연결된 해상통로로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였다.  
셋째, 조선 관리들이 67명의 선원 명단 등 세세한 기록까지 승정원에 보고하면서 정박한 지역이 고대도로 잘못 보고했을 리 만무하다는 반론은 <그럴 리가 없다> 식의 막연하고 추상적 소설에 불과하므로 논급 대상이 되지 않는다.    
넷째, 문정역관 오계순의 보고 기록 내용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식의 막연하고 추상적 반론이다. 오계순은 조선정부의 조사관이 아니라 통역관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다섯째, 7월 22일 녹도별장의 이양선 출몰을 보고 받은 수군우후 김형수가 7월 25일 등노(Teng no)와 도선사를 파견하여 그 배를 안전한 항구로 이동시키고 26일 그들이 직접 만나 문정하였다는 주장도 부분적으로 잘못되었다. Teng no가 면담한 첫 날짜는 7월 25일이 아니라 7월 24일이다.    
여섯째, 귀츨라프는 7월 30일 감자를 심어준 후 언덕위에 당집을 찾았으며, 고대도에는 지금도 신당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서의 집필을 위하여 정밀 조사한 결과 7월 30일 감자를 심어준 장소는 고대도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원산도(북위 36도 22분, 동경 126도 24분)로 조사되었다.  린제이 보고서에 감자를 심을 때 잠깐 동안 수 백명의 주민들이 둘러서서 놀라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인적자원 조건도 고대도에는 구비하지 못했다. 또한 당집도 고대도에 한곳 있었지만 이곳은 귀츨라프가 7월 30일 돌아본 곳이 아니다. 고대도의 10배 면적에 달하는 원산도에는 구찌, 도투머리, 풋살, 선촌, 진고지, 짐말 등 수없이 많은 당집이 있었으며 이중에서 정밀 조사결과 7월 30일 방문한 당집은 진촌(진고지) 으로 고증되었다.
일곱째, 귀츨라프 일행이 1832년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정박하여 Gan keang으로 알고 있었던 곳은 당시의 행정 구역상 고대도 안항이 분명하다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주장이이므로 다음의 제3절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귀츨라프 일행의 충청해안 항해 경로와 정박일정은 ⓵1832년 7월 21일 외연도에 정박하였다. ⓶7월 22일 녹도에 정박하고 ⓷7월 23일 불모도에 정박 하였으며 ⓸7월 24일에는 고대도 정박하였다.  ⓹그리고 7월 25일 원산도(개갱)에 정박하였다고 본서는 거듭 주장하였다.  (집필자 귀츨라프연구소 대표 신호철)  





증보판 제1장 귀츨라프와 원산도
귀츨라프의 고대도 정박과 원산도 활동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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